당신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습니까?
인식은 삶의 여정을 이끄는 선線입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각자의 ‘세계’를 살고 있죠. 서로의 얼굴이 다른 것처럼, 의식의 높이와 방향도 개인마다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주체의 인식적 한계는 대면하는 세계 너머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언어로 개념을 단순화한 피상적인 소통이 우리에게는 더 편하니까요. 여기에 길들여지면 더 이상 인지의 가능성들을 확장하지 않게 됩니다. 현대의 소비사회는 아름다움 조차도 몇 마디 상징과 단어로 감정 없이 소비합니다. 생각의 일방통행과 같죠.
본래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진화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보고,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욕망하는 개인들 앞에 불현듯 나타나는 것이 세계입니다. 세계는 기존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의 낯선 측면을 드러냅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들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어서 쉽게 정의되지 않습니다. 별 보다 많은 의미의 레이어들이 끝없이 겹치고 나누어지죠. 그러니 인지하는 자에게 드러난 세계란 잠재성이자 가능성입니다. 깊어진 사고와 담론, 각각의 관점마다 그 얼굴이 계속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이 무한한 것과 달리, 우리는 그 느낌과 감각하는 일련의 과정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은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존재적 외로움의 근원일지도 모릅니다. 서로 닿을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우리는 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넘으려 시도 합니다. 의미가 되는 가능 세계를 발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 현실화하고자 노력하죠. 저는 그 표현의 결과가 우리가 말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닿기 위해서 뻗은 손이라고 할까요.
이런 맥락에서 예술이란, 개인 앞에 나타난 무엇을 표현하는 도구일 것입니다. 예술은 한때 그 자체로 권력이거나 과시의 수단이었을지 모르나, 현대 예술은 더 이상 장식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잠깐의 유행이나 사조가 아니라, 완연한 변곡점을 지나버린 진화일 것입니다. 과거의 예술이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신앙이었다면, 현대 예술은 그보다 훨씬 다원적이고 인본적인 사유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현대 예술은 상식적이고 시큰둥한 기존 세계의 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의식적 확장을 돕고 있습니다. 나아가 파편화된 개인들을 일으켜 세우고, 각자 주체가 되어 실존의 의미를 찾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부연해보자면, 육체에 한정된 자아를 인지와 사유의 정신세계로 확장한다는 개념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추상을 다루는 방식만 다를 뿐, 미술이나 음악, 문학 등 거의 모든 정신 예술이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Vassily Kandinsky, 1923(1)
현대 예술의 몇 가지 변곡점에 대하여
(1)
"회화는 정신적인 것을 그리는 것이다. 회화의 추상적인 형태들도 어쩌면 모두 자연 속에 존재하는 형태들일지도 모른다.”
Wassily Kandinsky, 1923 - Composition 8, huile sur toile, 140 cm x 201 cm, Musée Guggenheim, New York ©
일상의 차원에서 회화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사물을 그리는 방법론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떠올려 보세요. 빈 공간에 달과 별을 채워 넣고, 기호화한 엄마와 아빠를 그리죠. 시간에 따라 의식이 성장하면 아이의 내면세계는 확장됩니다. 의식은 추상화되고, 점차 현상 너머의 의미를 그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현대 회화는 더 이상 사물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표현이 재현을 대신하게 되었죠. 이제 회화는 실재하는 세계 너머의 가능 세계를 주관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바실리 칸딘스키(1)의 미술은 사유를 통해 하나의 낯선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뭔가를 관찰할 때, 내가 ‘아는 것’을 ‘보는 것’으로 단정 짓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보고 있는 대상에 어떤 의미론적 층차가 존재하는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각도가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세계가 드러나는 인지적 현상을 경험했으니까요. 반대로 우리의 의심하는 내면 역시 어떤 가능 세계의 한 단면이 됩니다. 이것이 세계의 확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본질은 고정되지 않는 것으로 본질의 부재, 즉 다양성에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미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모호한 ‘어떤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미 규정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로지 나에게 의미가 있는 ‘어떤 것’을 나 스스로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2)
Op.127: II. Adagio, ma non troppo e molto cantabile (1825)
"주제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고, 변주의 기반이 무엇인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마치 작곡가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악상을 기록한 것처럼 들린다.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운 미학의 세계를 선포하는 것 같다."
- Jan Caeyers, 『Beethoven, A Life (2012)』
음악의 세계에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음악은 규율Kanon이 있는 예술입니다. 노래이자 시詩이기 이전에, 신성하고 신비로운 수학이었죠. 음악의 구약성서로 꼽히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1722, 1740)』은 그렇게 '발견'한 세계의 완성이자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재현했던 고전 회화처럼, 바흐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규정했습니다.
이 절대적 카논에 처음 도전한 사람은 베토벤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음악으로부터 내면의 특별한 이상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된 것은 1810년 작곡한 『현악4중주 11번』입니다. 베토벤은 이 곡의 출판을 거부하며, "소수의 수준 높은 감상자들을 위한 곡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과 인류를 위해 다른 차원의 장대한 음악세계『교향곡9번, 합창 (1824)』를 열었던 베토벤의 시선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내면으로 향합니다. 규율의 질서를 녹이는 낭만성과 죽음을 초월하는 인생에 대한 사색이 그의 마지막 4중주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나온 의미 있는 변곡점이 『현악4중주 12번』(2)입니다.
그의 마지막 현악4중주들은 편안하기만 한 음악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멜로디의 해체가 일어나거나 고도로 추상화되어, 듣는 사람에게 긴장과 노력을 요구했죠. 그런데, 의도된 불협화음과 긴장, 추상성과 난해함만이 후기 베토벤 음악의 본질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는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균질한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어요. 그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실존의 의미를 발견하고, 용기 있게 손을 뻗어 그 의미를 획득한 예술가입니다. 종속적이지 않은 이런 개인적 시선과 태도가 현대 추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예술 본연의 속성이지요.
Robert Musil, 1930 ©
(3)
“Why, then, aren’t we realists?” Ulrich asked himself. Neither of them was, neither he nor she: their ideas and their conduct had long left no doubt of that; but they were nihilists and activists, sometimes one and sometimes the other, whichever happened to come up.
—Robert Musil, 『Der Mann ohne Eigenschaften (1930)』
나와 다른 세계를 계속해서 발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고정된 관점의 방식을 깨고, 생각을 끝없이 분열시켜야 가능합니다. 어떤 것은 잘 이해되지 않고, 어떤 것은 납득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는 은근한 불편함이 생겨납니다. 그저 쉽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나태함의 중력에 못 이기는 척, 눕고 싶죠. 그러나 수많은 예술가들은 이것이 곧 우리의 진화이자 즐거움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현대예술의 변화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 서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만들고 운율로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것과 달리, 현대 문학은 명쾌하게 즐겁지도, 썩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규정되지 않은 모호함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사람을 지치도록 몰아넣지요. 18세기 이후 서양문학은 지적 예술로서 고도화되었고, 이후 실존주의를 거치며 지독히 난해한 세계로 진입합니다.
문학의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는 보르헤스의 소설들이나, 로베르토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930)』(3)와 같은 작품은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실제로 이런 작품을 읽는 일은 매우 지치는 일입니다. 간신히 감만 잡으며 정신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이런 작품은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 걸까요?
문학은 생경하거나 강렬한 어떤 감정의 나열을 통해서 ‘존재’들이 무언가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작가의 무의식적 정신에 접속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세계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는 멀리 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서 기존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재구축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문학은 이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예술은 무한의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어느 것도 고정되어 정의되지 않죠. 각각의 예술은 나름의 관점을 제시할 뿐입니다. 관점들을 연결하고 어떤 의미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미들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세계는 자신의 힘으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타인의 생각에 종속된 사람은 그 종속에 정직하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점점 종속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계속 지나게 되면 결국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Peter Zumthor, 『Bruder Klaus Kapelle (2007)』 ©
깨어난 시민들의 세계
(4)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1927)』
고전 예술의 정신은 이후 사진, 건축, 영화, 패션 등 새로운 미디어와 산업으로 확장됩니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고도로 발전한 사회와 기술 분야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변주했습니다. 이제 작가들은 추상적 사고와 고도의 기술을 동시에 다루어야 합니다. 즉, 건축가나 사진가, 디자이너와 같은 직업작가들은 지난 시대 예술가들처럼 ‘실존과 세계’를 고민하는 동시에, 실제적 기능을 습득하고 표현법을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축가 춤토르는 "내가 생각한 건물이 장소와 기능에 정확히 부합한다면, 굳이 예술적 장식을 첨가하지 않더라도 건물 자체가 힘을 가질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춤토르가 발견한 ‘가능 세계’입니다. 그는 고전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아가 건축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현실화하기 위해 건축기술, 소재에 대한 이해, 미술적 밸런스 등 수없이 많은 기술을 익혔죠.
이 이야기는 일부 엘리트 작가들의 작업실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가능세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도 실현의 기회는 언제나 머물고 있어요. 기술의 발전과 사회 생산성의 급격한 증가 덕택에, 이제 여러분은 언제든 다양한 지식을 접하고 쉽게 도구를 사용하여, 일상에서 지속적인 창조와 혁신을 거듭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무수히 많은 가능 세계들을 편견 없이 만나고 누릴 수 있다면, 그때에 우리는 더 이상 적막한 섬이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애써 선택하지 않습니다. 거대도시 속의 우리는 내던져진geworfen 존재(4)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나 공격받기 쉬운 반면, 현대 사회는 합의된 정의와 상징으로 이룩한, 견고한 알고리즘의 기계입니다. 사회는 '자극과 반작용'의 형식과 방식을 규정하여 우리에게 <정보>의 형태로 끊임없이 건네주고 있습니다. <정보>는 미디어에서 선전되거나, 이웃과 친구에 의해 강요됩니다. <정보>는 곧 명령입니다. 제공된 명령에 의해 나의 생각의 방향과 행동이 정해지고, '생각하지 않는' 편리함에 우리는 중독됩니다.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꿈꾸기보다, <정보> 자체를 경쟁적으로 모으기 시작합니다. 마치 정보를 모으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처럼 말이죠.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하이데거도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들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입니다. 언제나 긴장한 채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누군가의 부하에게, 또는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부하로서 희희낙락하며 영락해가는 것입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2012)』
깨어나야 합니다.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이 당위의 시대를 끝냈던 것처럼, 우리도 용기를 내어 타락한 <정보>를 거부할 때에야 진정성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진정성authenticity이란,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자신의 신념과 욕망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예술의 모든 표현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현대 상업 예술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외부의 명령이 아닌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성장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유이고 예술입니다. 여러분 또한, 지난 시대 예술가들처럼 ‘실존과 세계’를 고민하는 동시에, 실질적인 기능을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적인 옷 입기의 권유
같은 맥락에서 현대의 패션 또한, 조금 다르게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옷은 나와 가장 닮은 존재이고, 나의 가면persona입니다. 옷 입기는 단순한 꾸미기가 아니라, "내가 인지하는 나"를 가장 나답게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나답게 입어야 하고, 나답게 입으려면 확정한 내가 필요합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면 나답게 입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식자들의 가벼운 충고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옷입기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멋지게, 분위기 있게 입기 위해서는 "내가 나로서 어떻게 아름다울 것인가"의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보아온 대담한 예술가들의 성취가 그 자신의 세계를 드러낸 결과물이었던 것처럼, 옷입기는 매일 나 자신의 세계를 쌓아가고 만들어내는 일이 됩니다. 그 표현이 잘못되고 있다면, 내가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표현에 그들의 언어 - 하이데거에 의하면, "they-self" - 가 가득하기 때문이겠죠.
옷 입기조차 실존을 드러내는 시적인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화려하고 예쁘기만 해서는 이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조형의 원리와 관계가 있고, 우리의 심미적 본능에 닿아 있으며, 무엇보다 "나다운 것"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술처럼, 추상적 사고와 실물 세계의 기술을 동시에 다루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나로서 존재하고 나답게 입으려면, 나를 확정하고 표현하는 실제적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옷입기의 기술적 표현이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포인트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정말 세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글 김대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