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불구불한 선들이 위태롭게 허공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언뜻 물줄기처럼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가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저 자유는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중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엔 그들이 너무 가벼운 탓입니다. 한데 꼬여 실을 이루는 원사들의 응력이 제 무게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렌즈 경통을 조금 돌렸을 뿐인데, 세계는 이렇게나 달라집니다. 초점거리가 짧아지면 더 많은 빛들이 산란합니다. 살갗으론 느낄 수 없는, 꾹 참아낸 날숨보다 더 느린 공기에도 이 탯줄은 격동합니다. 우리 중 가장 민감한 몇몇만이 잠깐 숨을 멈추는 것으로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은 밀리초 수준에서 그들의 세계를 정지시켜 드러내지만, 지난 며칠 동안 저 작은 세계에서는 몇 세대가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세하게 변화하는 현상들을 제때 제대로 지각할 수 있다면, 사유와 감정을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음을 떠올려 봅니다. 결국 감정이란 다른 세계를 기꺼이 들여다 봐주려는 너그럽고 능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햇빛처럼 그저 때 되면 쏟아지는 감흥 같은 건 없습니다. 행위에 즉각적으로 이어지는 쾌감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 다른 방식의 풍요로움을 추구합니다. 포슬포슬하고 도톰한 코트의 끝자락과, 그 안에서 구조를 지탱하고 있던 흰 시침실, 그 늘어짐과 고유의 힘, 날선 금속제 포디움의 서늘한 모서리 광택, 사진 바깥에서부터 날아온 여러 갈래의 빛이 깨끗한 벽에 만들어 낸 그림자의 중첩. 누군가에게는 그저 재현된 현실의 단편에 불과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당장 옷장에서 꺼낼 수도 있는 코트 한 자락에 대체 어떤 의미가 더 담길 수 있단 말입니까. 고정된 상징과 확대한 의미를 간편하게 나열하는 전시에 익숙한 관람자라면 흔히 할 법한 불평입니다. 이를테면, 여기에 걸린 레리치의 옷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고전적 기법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공예적 보존 가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술성이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이란 오롯이 개인적 특성의 영역에 있습니까?
김대철의 작업에서 보편적이고 적확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과제입니다. 따라서 재료의 선정과 가공, 세부사항을 결정함에 있어 내포된 진정성이 신중하게 고려되며, 마감과 배치에서 이른바 '완벽한 균형점'에 대한 욕망과 자신감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이것은 미리 계산되거나 정교하게 연출된 것이 아니며, 의미는 매 순간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뿐 그 자체로 결정되거나 반복해서 재현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그가 레리치를 통해 비스포크 서비스에 집중하면서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 등의 말을 꾸준히 참조하여 문제제기를 해왔음을 떠올려보면, 그의 철학적 좌표가 대강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그의 행위가 공예의 결과인지 또 다른 예술적 추구의 도상에서 발생한 파편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어쩌면 그러한 시도 역시 형식에 얽매인 사고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은 예술을 모방하고, 물질 공예는 그것을 현재에 가능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오래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Enhancement』2022JUL27-31, Sowol-ro138, Lerici
전시에 사용된 알레고리들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으므로, 보다 근원적인 사고방식을 살피기 위한 실마리를 설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그의 출발점이 상업 브랜드나 여타 예술가들의 행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패션과 예술은 꽤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따라서 많은 현대인이 이런 행태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으나, 둘 사이의 피학적인 관계에 대한 김대철의 문제 의식은 레리치의 행동을 기존 브랜드의 그것과 구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패션과 예술의 관계를 비판해 온 일반의 담론에는 '패션 자체가 시각예술의 일종'이라던가, '상업성 때문에 패션은 궁극적인 예술이 될 수 없다'던가, 그도 아니면 '서로의 발전을 위해 같은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양자'라는 정도가 있었습니다. 이 구도에는 패션의 속물 근성과 예술 본연의 순수함이라는 다소 뻔한 도식이 전제되어 있으며, 예술을 통해 이미지를 개선하여 브랜드를 차별화하고 홍보하려는 금융자본의 마케팅적 의도와, 자본에의 접근을 갈망하는 아티스트의 욕망이 유착합니다. 이렇게 세련되고 정치적인 협업은, 직접 공방을 운영하는 독립적인 디자이너이자 성공한 제작자인 김대철이 진화해 온 방식이 아닙니다.
레리치에서의 지난 18년 내내, 혹은 그보다 몇 년 앞서 세븐오에서부터, 그가 행함에 있어 일관되게 내비쳐 온 것은 완성에 대한 헌신과 집착에 가까운 숭배입니다. 식상한 이분법들 따위는 이미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의 방식은 럭셔리 브랜드나 패션 비즈니스의 그것에 머물지 않았고, 그렇다고 현재와 유리되어 독선적인 고상함만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기학대적이고 고행적인 反비즈니스 방식을 취해 온 까닭은 그저 일관된 진정성을 향한 신앙에 가까운 강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서술은 이내 공예의 성질에 대해 떠올리게 합니다. 공예의 세계에서는 행한 만큼만 결과가 주어지며, 여기에는 요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강력한 인과에 지배되므로, 행함에 있어 원칙과 도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환경이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를 현상학적 요체에 다다르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순수 감각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존재를 느끼는 예술가이고, 그 자신이 이미 체득하여 당연하게 보고 있는 현상들을 남들도 분명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때문에 도저히 거짓된 것을 내놓을 수 없고, 그럴싸한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겪고 있는 공예의 시간이란 전혀 생산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볍게는 '공예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르는, 진정성에 대한 순전한 믿음과 고지식한 행함이란 오늘날의 비즈니스 측면에서 구닥다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도덕률을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인간"임을 수긍하고 재무제표에나 열정적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훌륭한 경영자로서의 태도일 수 있는 시대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환원적 오류와 계층적 서열화의 교만함에 취해서는 끊임 없는 관념적 분절의 지옥에 머물 수 밖에 없으며, 도망친 그 어디에서도 천국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기꺼이 고행으로 그를 추동하는 것은 "핏줄에 희미하게 흐르는 오래된 삶의 기억"입니다. 김대철에게 있어 인간이란 별과 같은 물질에서 원래한 것입니다. 살과 별은 마찬가지로 우주먼지에서 비롯했으되,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다른 형태를 향해 의지적으로 나아간 결과입니다. 이때 모든 정보는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하려 합니다. 돌은 불변함으로 정보를 간직하고, 나무와 사람은 세대에서 세대로 정보를 복제합니다. 물론 우주의 출몰과 그 아득한 순환이라는 코스모스적 시간을 상상해보면, 그것들의 생존 전략이란 가련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정도의 시간을 이겨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이 비천한 생에 약간의 의미를 발견해 본다면,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역할을 하는 베케트적 의미일 것입니다. 부조리를 견뎌 기꺼이 정보를 - 김대철의 언어에 의하면 '아름다움을' -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멸을 탐하나 이룰 수 없는' 생명과 예술은 큰 틀에서 같은 의미와 목적을 가질 것입니다. 별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별이 되는 시간의 크기를 이 생에 이해하려 욕심 부릴 필요 없습니다. 의미에 정합한 형태를 잉태하고, 주어진 이야기를 이어나는 것이 삶입니다. 자연법칙을 따르는 종교는 윤회와 인과로, 유일신을 따르는 종교는 구원과 원죄로 은유하는, 배교한 죄인일지라도 끊임 없는 배움과 끈질긴 사고를 통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일종의 겸허함이 또 하나의 실마리입니다.
(1) Eric R. Kandel, 『The Age of Insight: The Quest to Understand the Unconscious in Art, Mind, and Brain, from Vienna 1900 to the Present (2012)』
우주와 미시세계를 오가는 관념의 망원렌즈를 통해 탄생한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가깝고 선험적입니다. 가령, 이미 우리는 서로 다른 순환의 시점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는 어떤 과정 중에 있으며, 매 순간 가장 완벽한 상태로 머무르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보는 시간에 취약하여 사라지기 쉬운 특성을 가집니다. 따라서 반드시 시작과 끝, 생과 별, 정점과 하강을 경험해야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품, 마이클 '에어' 조던, 게의 형태로 수렴하는 갑각류들, 타히티의 푸른 바다와 열대저기압, 골디락스 존에 위치한 '창백한 푸른 점'의 바이오스피어와 수십억년 내내 꿈틀대고 있는 지각, 식어가는 6,000K의 적색성까지. 존재는 각자 내재된 힘에 의해 정점을 향하고 있거나 이미 다다른 바 있으며, 언젠가 자신의 시간을 경험하며 반드시 낡아갈 것입니다. 김대철은 이 운명이야말로 언어로 철학하기 이전의, 가장 근원적이고 시적인 경험이자 "사유되기 이전에 지각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옷으로부터 탈거되는 시침실의 이미지는 분명 잉태와 출산을 우화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언제나 노화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 작동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프란시스 베이컨의 푸줏간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나의 몸을 이리저리 해체하여 쇠꼬챙이에 걸면, 기능을 실행하는 각 부의 기관이 나타나고 세포들이 서로 관계하는 세부구조가 드러납니다. 이렇게 환원적인 해부학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게 우리를 자극했던 특정 시기가 있었습니다. 에릭 캔델1)은 클림트와 주커칸들이 살롱에서 만나 통섭한 결과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내며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생의 순간을 박제한 것은 삶을 찬양하기 위함이거나 죽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적인 관찰자와 메시지로서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행위만으로 존재하는 관념적인 포토그래피가 있다면 한결 쉬웠겠지만, 여러분과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성의 언어를 가져다 나열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만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의 해석이란 형이상학적이고 분절적일 수 밖에 없겠습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처럼 말할 수 없는 것, 의식할 수 없는 것, 사유할 수 없고 추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여기에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럴 수 없으므로 에둘러 쓰자면, 결국 관계성이야말로 이 모든 우화 너머에 도사린 근원적인 동력일 것이라 짐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오브제로서의 옷은 매우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조 속에서 대상화되기도 하고, 구조 그 자체로서의 대상을 경험하기도 하며, 타자를 통해 재구축되기도 하는 것처럼, 오브제들은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얼마든지 독립적인 존재로서 다양한 위상과 다층적 의미로 분화합니다. 그런데 옷은 다름 아닌 '살에 입는 것'입니다. 육화된 의식인 신체를 모방하여 감싸는, 제법 이상한 물物입니다. 즉각 인지되는 대상이자, 감정이입과 투사가 발생하는 관념 신체의 연장이자, 감각과 지각 그 자체가 일어나는 현상의 장으로서 기능합니다. 따라서 내-외부와의 관계를 새롭게 의식하는 가운데 오브제로서의 옷은 다방향으로 다면적으로 동시적으로 작동합니다. 이를 통해 김대철은 비단 물리적 대상물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행위와 순환적 시간, 사용자와의 관계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경계들, 그리고 그들의 세계 너머에까지 말하자면 구성작용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오브제를 벗겨내고, 낡아갈 운명과 끈질기게 조우합니다. 이 강력한 의지가 형태를 부여하고, 현상 세계에 탯줄을 뻗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글 김준기
사진 H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