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이미지가 자본으로 기능하는 시대, 모두는 미디어에 전시되어 실체 없는 삶을 얻는다. 실재實在보다 더 실제實際적인 이미지들이 원본을 대체하고, 원본의 기억은 사라진다. 이제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옷을 입는다. 타인의 욕망에 의존한 채, 사회적 기준에 알맞은 모습이 되기 위해 스스로 몸을 재단하고 기획한다. 나르시시즘의 미디어 속에 갇힌 우리는 거울에 둘러싸인 인형이나 다름없다.
내면의 자의식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에서 불편함이 생기면, 자의식은 전시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정신의 일면이다. 부조화를 감지하고 정체성과 의미를 복원하려는 이 작은 움직임이 지금껏 우리의 인간성을 지켜왔다. 그러니 우리에겐 이미지 너머의 현실을 상기하고 실재를 기억하려는 작은 시도가 필요할 뿐이다.
한 번의 바느질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감각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본래적 방법에는 실재에 대한 기억이 서려 있다. 그러니 이 과정은 간소화되지 않는다. 과정을 따른 내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점멸하는 바느질이 감각을 일으킨다. 만드는 이는 감각을 몸에 각인하며 지속적으로 실재를 마주한다. 손끝에 남은 감각은 다음 감각을 인도하는 선線이다. 복잡한 의도나 꾸밈없이. 감각이 감각을 따라 이어진다.
바느질의 속성은 기능하는 것이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바느질이 보여지는 것으로 기호화하면 옷의 본질적 가치는 훼손된다. 기호는 옷의 외양外樣이고 기능은 내부의 의미이다. 기호는 기능을 모방할 뿐, 실재가 아니다.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척하는 것이다. 반대로 기능은 의미를 가지지만 그 의미를 숨기려 한다. 전자는 <없음>에 속하고 후자는 <있음>에 속한다. 손으로 옷을 만드는 일은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렇게 일백여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형태가 된다. 오염된 의지들이 제거된 상태, 이른바 원형이다. 원형은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다듬고 남겨준 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외양의 것들이 시간에 의해 사라지고, 모든 형태는 스스로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기로서 존재해야 하는 모습, 곧 형태의 종점이다. 시간을 견디는 바느질이란 형태의 종점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자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재료일 뿐, 그 자체로 달성해야 하는 목적이 아니다.
옷은 우리 존재의 모방이다. 내 몸에 가장 가까운 형상을 한 복제이자 나의 실재를 상기시키는 오브제다. 그러나 시간에 따라 자기 모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지 않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실존하기 위해, 우리는 <있음>을 감각하고 기억해야 한다. 이 물리적 감각은 흩어지기 직전의 인간성을 현실에 잡아두는, 그러니까 정신의 닻이다. 우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회복을 위한 실마리를 얻는다.
글 | 레리치
사진 | 허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