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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 Textile 레리치 X 승효상

“현대 의복은 영혼이 충만한 사람들을 위한 옷이다. 독립적이고 강인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입는 옷. 이미 자신의 정체성이 온전히 확립된 까닭에 애써 화려한 색이나 깃털, 난해한 스타일로 치장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 Adolf Loos, 『Warum ein Mann gut angezogen sein soll』

김 : 이번 비스포크를 경험하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승 : 보통 새 옷을 입게 되면 처음 발생되는 일이, 옷과 제 몸이 싸우는 일이지요. 옷은 옷대로, 저는 저대로, 관성이 있어서 삐걱대고 부딪히다가, 시간이 지나야 조금씩 양보하면서 서로에 맞춰 갑니다.

​그런데 이 옷은 처음 입는 순간부터, 입은 듯, 입지 않은 듯, 그런 ‘투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 다소 놀랐습니다. 아마도 옷을 만드는, 혹은 '짓는' 과정에서 이미 그 갈등을 해소했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움직인 바늘의 처절한 싸움 끝에 만든 평화 아닐까 생각했지요.

 

(1)

'세상의 참된 평화', 중앙시평, 2017 ©

김 : 선생님 글에 보면, "architect와 textile의 어원이 tektontech으로 같다"고 쓰신 부분이 있어요.(1)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위해 옷/집을 짓는 행위에는 비슷한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시작과 끝에 결국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안에 머무는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는 것도, 지어낸 결과물이 안팎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그렇고요. 이번 작업에서 특히 어떤 부분에 공감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승 : 말씀하신 대로 옷도 ‘짓는 일’이라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짓는다는 것은 어떤 질료를 가지고 개념을 설정하고, 그 결과를 상상한 후, 완성을 향해 구축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글 짓는 게 그렇고, 농사도 그렇지요.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옷을 그렇게 짓습니다. 특히 만드는 과정 중에 실 매듭들이 남아 있는 옷을 보면서, 작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 : 특별히 수도원 순례를 좋아하시는 것도 결이 비슷한 이야기로 느껴지는데요. 혹시 조용하고 단정한 레리치의 옷을 그런 시선에서 읽어볼 수도 있을까요? 실례가 안된다면 레리치의 태도는 어떤 건축, 어떤 사조와 비교해 볼 수 있을까요?

승 : 짓는 일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로마네스크가 이에 가장 충실한 건축양식입니다. 돌이나 벽돌로 공간을 축조하는 과정이 그렇고, 절제할 수밖에 없는 개구부 사이로 흐르는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리듬이 늘 나를 경탄하게 하고 침묵하게 합니다.

건축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는 일이어서 지금의 제가 로마네스크 건축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본질에 대한 애정이 늘 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수도원도 본질에 대한 탐구와 그리움에 관한 시설입니다. 레리치도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본질에 대한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양식의 흐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스타일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김 : 저는 전체적인 인상, 혹은 예술적인 미감을 뜻하는 '분위기'를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옷은 피부에 가장 가까이 닿는 구조물이고, 그 관찰 거리가 매우 가깝지요. 그래서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세부적인 디테일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집요한 공예적 수행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집착이 레리치의 성격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작업하시는 과정에서 가장 집요하게 신경 쓰시는 디테일이나, 끝내 달성하려고 하는 개념적 표상 같은 것들을 적어주실 수 있을까요?

승 : 부질없긴 하지만 건축가를 두 부류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지식인과 예술가인데, 후자는 상황이 어떠하든 자기 스타일만 일관되게 실현하는 건축가이고, 전자는 장소와 기능에 따라 대응하는 작업을 하는 이입니다. 저는 지식인적 건축가에 속하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건축의 해법이 경우마다 다릅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게 있는데, 바로 제가 빈자의 미학에서 주장한 것들입니다. 도시, 공간, 기능 그리고 형태에 관한 나의 한계를 설정한 것들이지요.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목표를 굳이 들라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존엄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실은 이는 유엔 인권선언의 서문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김 : 레리치 공예의 핵심 중 하나는 에이징입니다. 모든 부분에 손바느질을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평면으로 직조된 씨줄과 날줄을 3차원으로 촘촘히 엮을 때, 각 바느질의 당김에 일정한 여유를 두어 원래 원단과 같은 물성을 갖게 하면, 약간의 공기층을 가진 구조물이 형성됩니다. 이 여유 있는 구조가 옷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고, 부드럽게 만들며, 오래도록 에이징이 가능하게 합니다.​

아마 건축만큼 에이징에 신경을 써야 하는 분야도 드물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참여하신 결과물 중에 녹슨 철제를 사용한 특징적인 외관 디자인을 보면, 라이프 에이징에도 각별함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승 : 그렇지요. 건축물은 제가 만들지만, 건축의 완성은 시간이 한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삶을 위한 기반시설을 만들 뿐이며, 그곳에서 사는 삶을 통해 진정한 건축이 이루어집니다. 건축은 늘 변하는 생물이며, 그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축일수록 감동적일 겝니다. 제 건축의 단순함은 변화를 기다리는 여백입니다. 이를 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목표인 미니멀리즘과의 유사성을 거론하는 것은 제 건축을 잘못 이해한 결과지요.

 

김 : 결국 건축과 옷은, 그 내부에 거하는 사람과 그 삶에 바탕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사조와 양식이 있지만, 또한 불변의 가치도 분명 있다는 것도요. 그런 맥락에서, 여전히 '남자가 잘 차려입어야 하는 이유'란 뭘까요?

승 : 제 건축에 깊이 영향을 준 오스트리아의 아돌프 로스라는 건축가는 『남자가 옷을 잘 입어야 하는 이유』라는 글을 썼는데, 그 중 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현대 의복은 영혼이 충만한 사람들을 위한 옷이다. 독립적이고 강인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입는 옷. 이미 자신의 정체성이 온전히 확립된 까닭에 애써 화려한 색이나 깃털, 난해한 스타일로 치장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이 글로 대답을 대신해도 될 듯합니다.

김 : 마지막으로, 이미지와 본질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원본과 복제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가 있는 시대에서, 우리 모두는 삶에서 주체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죠. 하지만 현대인들의 소비양식을 보면, 본질만큼이나 이미지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거든요. 이런 시기에, 본질에 바탕을 둔 옷 만들기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여간 고민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어쩐지 선생님께서는 명쾌한 답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승 : 표리부동이라는 말이 있지요. 본질과 이미지가 다르다면 바로 이 말과 같습니다. 본질을 떠난 이미지는 허약하고, 이미지 없는 본질은 막연하며 때로는 공허하기 마련이지요. 어쩌면 완성된 인격이기 힘든 우리 모두 표리부동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둘은 상호 모순적일 때도 있고 대립할 때도 있지만, 서로 보완하며 결국은 일치시키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일일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겠지요. 비록 참으로 어려운 일이긴 해도….

인터뷰 승효상, 김대철
사진 안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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