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ite has limited support for your browser. We recommend switching to Edge, Chrome, Safari, or Firefox.

Cart 0

No more products available for purchase

Subtotal Free
Shipping, taxes, and discount codes are calculated at checkout

Your Cart is Empty

계단과 무대 Stufen und Bühne

우리는 STAGE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Neo : 저는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 일종의 평행우주를 만들려고 합니다. 먼지 덮인 유리창 너머로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거죠. 우리는 유리 너머의 장면을 볼 수 있지만, 그 안의 인물들은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가 익숙한 방식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저는 서로 다른 시대의 옷을 섞어 입히기도 합니다. 컨버스 같은 신발에 19세기 코트를 입히는 식이죠. 인물이 얼마나 낯설어야 하는가, 그것이 그림에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결정은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내리는 것입니다.

이건 무대에 관한 이야기예요. 무대 위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죠.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스테이지’라는 단어는… 완전히 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미묘하네요. 네…

 

 


그가 멈춘 그 단어를 나는 다른 뜻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KDC : 오래전에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었습니다. 그 안에 「계단(Stufen)」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를 읽은 뒤 나는 옷을 하나의 완성된 형태보다, 여러 단계를 지나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만드는 일에도 나름의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술을 익히고, 그 다음에는 오랜 전통 안에서 옷을 만듭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나는 5년 전부터 다섯 번째 계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 끝에 특별한 옷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옷에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다만 그 평범함에 이르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내가 처음 영어로 레리치의 Stage 개념을 설명했을 때, 네오가 떠올린 것은 독일어의 무대, 뷔네( Bühne )였을 것입니다. 내가 말한 Stage는 계단, 슈투페 ( Stufe ) 입니다.

그의 무대는 유리창 너머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 일어나는 일들의 자리입니다. 나의 계단은 옷이 한 단계씩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시간입니다.




로사는 네오의 생활부터 이야기했습니다.


Rosa : 그는 옷을 아주 오래 입는 사람이에요. 평일에는 자전거로 10km를 달려 작업실에 가요. 거기서 일하다 보면 옷에 물감이 다 묻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죠. 수트에 어울리는 생활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수트를 아주 오래 입어요.

Neo : 여기 보세요. 이게 다 유화 물감이에요. 얼마 전에는 아끼던 짙은 초록색 바지를 망쳤어요. 근처에 주황색 물감이 있었거든요.



 

원단을 고르는 자리에서 로사가 가장 먼저 찾은 색은 짙은 초록이었습니다. 어깨가 부드러운 그의 몸에는 이탈리아 원단보다 조금 더 힘이 있는 영국 원단이 맞을 것 같았습니다.

여러 원단을 펼친 끝에 우리가 고른 것은 원사 자체에서 색을 낸, 진흙 같은 톤의 초록이었습니다. 광택이 없고 매트해서 손바느질의 스티치가 아주 은은하게 비치는 원단입니다.


 

 

Neo : 제 차 색깔이랑 비슷하네요.

Rosa : 자전거만 타고 다녀서 그 차는 자주 못 타요. 그래도 형태는 정말 아름답죠.


주황색 물감에 잃어버린 초록 바지의 자리에 새로운 초록이 들어갑니다.



 

KDC : 이 옷도 오래 입으셨으면 좋겠어요. 막 입어도 되고, 비를 맞아도 되고, 진흙에 굴러도 좋습니다. 30년 후에 자녀에게 물려주셔도 좋고요.

Neo : 30년까지 갈지는 아직 장담 못 하겠네요.

Rosa :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나이예요. 언젠가 손주가 그 옷을 입고 찾아올지도 모르죠.



 

옷은 100여 시간의 바느질을 거쳐 라이프치히로 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포르쉐 안에서, 작업실에서, 자전거 위에서, 물감이 튀는 어느 오후에 조금씩 낡아갈 것입니다.

옷이 잘 낡아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날, 옷을 지은 우리의 손은 그 안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네오 라우흐(Neo Rauch)는 1960년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라이프치히 미술대학에서 공부했고 지금도 그곳에서 작업합니다. 독일 통일 이후 라이프치히 출신 작가들이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신 라이프치히 화파’라는 이름이 생겼고, 라우흐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모두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 화면 안에 있고, 공장과 들판, 현실과 꿈이 한곳에 놓입니다. 그는 그 세계를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평행세계라고 말합니다.


 


로사 로이(Rosa Loy)는 1958년 동독 츠비카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원사 집안에서 자라 원예학을 공부했고, 몇 해 동안 정원사로 일한 뒤 미술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흙과 식물을 먼저 알았던 로사의 그림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경계가 흐릿합니다. 숲과 정원, 여성과 식물이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화면 안에 놓입니다.

두 사람은 라이프치히에서 함께 작업하고 살아갑니다.

 


글 KDC
대화 Neo Rauch, Rosa Loy, LERICI


Suggested Reading

LERICI X 손석구 - Some of These Days

LERICI X 손석구 - Some of These Days

  멀리 붉은 숨결이 산허리를 감고영원한 현재에 머물 것을 기대하는 이들이 산을 넘어갔다그들을 마지막으로 세상에 색은 남지 않았다더이상 나를 만지는 사람도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도 없다아마 나는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A Conversation with Cory Empting

A Conversation with Cory Empting

  본드 와이너리는 언덕의 흐름을 따라 놓여 있습니다. 포도밭 사이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건물은 풍경 뒤에서 늦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데크 끝에는 빈야드를 향해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고, 능선을 따라 이어진...

계단과 무대 Stufen und Bühne

계단과 무대 Stufen und Bühne

우리는 STAGE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Neo : 저는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 일종의 평행우주를 만들려고 합니다. 먼지 덮인 유리창 너머로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거죠. 우리는 유리...

LERICI X GHOST - Where Time Rests Quietly

LERICI X GHOST - Where Time Rests Quietly

  레리치의 대부분은 숲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나무들이 빛을 걸러내고, 바람이 불면 공기가 먼저 움직입니다. 빛은 하루에도 여러 번 표정을 바꿉니다. 아침에는 흰빛이 가볍게 흘러들고, 오후에는 녹빛이 깊어지며, 해 질 무렵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