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드 와이너리는 언덕의 흐름을 따라 놓여 있습니다.
포도밭 사이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건물은 풍경 뒤에서 늦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데크 끝에는 빈야드를 향해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고, 능선을 따라 이어진 포도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받습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햇볕에 데워진 흙의 냄새가 낮게 번집니다.

이곳의 풍경은 하나의 장면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와 그림자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정한 밭의 질서이지만, 그 아래에서는 계절과 토양이 천천히 축적되고 있습
니다. 잠시 시선을 두고 있으면 완성된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기보다, 진행 중인 시간 속에 들어
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때 코리 엠프팅이 데크로 걸어 올라왔습니다.
포도밭을 바라본 뒤 자리에 섰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코리 엠프팅은 나파 밸리에서 BOND 프로젝트를 이끄는 와인메이커입니다.
Harlan Estate와 Promontory의 와인 제작을 함께 맡으며, 서로 다른 땅의 성격을 하나의 와인
안에 남기는 작업을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습니다.

Cory
지금은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곧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이 시작되는 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성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 일에 가깝습니다.
와인 안에 남기고 싶은 것은 모든 요소를 걷어낸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구조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질서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서로 다른 건축의 구조에 비유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도나 타닌을 먼저 이야기하지만, 그것들은 표면에 가깝습니다.
와인 역시 그 아래 형태를 지탱하는 기반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기본 형태에 집중합니다.
포도나무는 수많은 환경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분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와인은 그런 조건들이 감각으로 드러나는 매개체라고 생각합니다.

KDC
본드에서 와인이 태어나는 과정을 ‘포도나무와 인간의 대화’라고 표현하신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은 판단들이 결국 구조를 바꾼다고 느꼈습니다.
옷을 만들 때도 비슷합니다.
보이지 않는 선택들이 인상을 결정합니다.
와인에서는 그런 판단의 순간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Cory
이 일의 상당 부분은 관찰로 이루어집니다.
저는 대상을 분리해 분석하기보다, 그것이 존재하는 환경 안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오랜 시간 같은 포도밭을 다뤄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나치는 신호를 읽어냅니다.
특별한 기술이라기보다, 조용한 관찰에서 생겨나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개입만큼 중요한 결과를 만듭니다.
비개입 역시 하나의 결정입니다.


KDC
와인은 결국 사람에게 닿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한 잔의 와인이 남기길 바라는 가장 본질적인 감각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Cory
우리는 100곳이 넘는 포도밭을 다뤄왔고, 그중 다섯 곳을 선택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
다. 그 과정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단순했습니다. 와인 안에서 우리를 건드리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습니다.
목표는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장소를 매일 다루지 않는 사람이라도 차이를 느낄 수 있도록,
그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종종 인간에 비유합니다.
인상적인 사람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미묘한 뉘앙스가 쌓여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와인 역시 마셨을 때 아무 감정도 남지 않기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각이 또렷하게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KDC
관찰에 머물고 개입을 최소화하는 선택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저희 역시 오랜 시간 선택하는 방식을 훈련해 왔습니다.
그러한 판단의 감각은 결국 반복된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Cory
최근 다시 읽고 있는 괴테의 『식물의 변형』이 떠오릅니다.
식물의 모든 부분이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형태로 변형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사물을 연결된 상태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깊은 집중을 느낍니다.
포도밭 역시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와인을 만들 때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와인이 산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마시는 사람 역시 하나의 상태 안에 머물게 됩니다.
잡음이 사라지고 집중이 높아지는 순간,
그 감각은 설명 이전에 직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저는 그 지점을 와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KDC
저희는 옷이 사람 곁에 조용히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명되지 않아도 남는 감각처럼요.
당신은 와인이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위안을 준다고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Cory
저를 진짜로 건드리는 와인들은 단순히 맛있다는 단계를 넘어섭니다.
몸과 존재 전체에 조용히 스며드는 감각이 있습니다.
위로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제게는 평온함과 고요함에 더 가깝습니다.
좋은 와인에는 복잡함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며 어떤 근본적인 것에 닿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길 바랍니다.
그 경험은 묘하게 큰 안도감을 남깁니다. 마치 이미 전체의 일부였던 것처럼요.

KDC
외부의 평가와는 별개로,
스스로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와인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Cory
제가 가장 흥미롭게 느끼는 지점은 결국 시간입니다.
와인은 포도나무의 시간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떤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가까지 함께 담고 있습니다.
언제가 준비된 순간인지 우리는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불확실성이 항상 남아 있습니다.
요즘 제가 계속 생각하는 것은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과, 어떤 이해의 정점에 오래 머무는 일 사이의 균형입니다.
와인은 아마 그 사이 어딘가에서, 시간을 품은 채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요.
하나의 가먼트를 기준으로 볼 때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듣고 싶습니다.

KDC
저는 시간을 단순히 흐르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가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발생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바늘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하나의 시간이 만들어진다면,
한 벌의 옷 안에는 수천, 수만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축적됩니다.
그 시간들은 직선이라기보다 여러 층위가 겹쳐진 구조에 가깝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시간, 결합되는 시간, 그리고 옷이 사람을 만나 함께 지나가는 시간이 서로 얽혀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저는 결과보다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시간이 더 큰 가치를 만든다고 믿습니다.
바느질은 그 시간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공예는 결국 집중과 태도의 문제이며,
그렇게 축적된 시간이 옷 안에 남을 때 비로소 고유한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평생 함께 할만한 자켓이 있다면,
어떤 옷을 떠올리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Cory
저는 어딘가 날것에 가까운 감각에 끌립니다.
색보다는 질감에 더 민감한 편입니다.
꼭 부드러운 소재만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 거칠고, 손에 걸리는 저항이 느껴지는 질감을 좋아합니다.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어,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 자체가,
제가 그런 옷을 좋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KDC
대화 KDC, C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