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클래식 현악사중주를 좋아합니다. 섬세한 균형감과 절제를 추구하는 것이 레리치의 가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악곡의 특징은 간결함입니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각 한 대, 단 4개의 악기가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면서 앙상블을 만들죠.
고작 네 명의 협연이라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현악 사중주는 가장 연주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간결한 악곡이어서 오히려 숨을 수가 없습니다. 연주의 본질이 매 순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화 『마지막 사중주 (A late quartet, 2012)』는, 수십 년간 유지해온 쿼텟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곳에 서 있는 균형인지를 드라마를 통해 보여줍니다.
쿼텟은 단순한 협연이 아니라, 완벽한 한 호흡의 합창을 목표로 하는 기예입니다. 네 명의 연주자가 앙상블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깊이 교감합니다. 음악학자 롤랑 마누엘Roland Manuel은 그의 저서 『음악의 기쁨 (Plaisir de la Musique, 1947)』에서 사중주의 민감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여덟 개의 팔, 네 개의 얼굴, 심장은 하나."
4개의 서로 다른 구성요소가 함께 호흡을 주고받으며 완벽한 하나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섬세한 조율을 매일 같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바로 수트를 입으면서 말이에요. 수트와 셔츠, 타이, 구두는 각기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선율과 리듬이지만, 우리 몸 위에서 하나의 분위기를 연주하게 됩니다.
수트와 셔츠는 각각 제1, 2바이올린입니다. 수트가 주제를 리드하면, 셔츠는 배경을 만들고 풍미를 더해줍니다. 얼굴의 인상을 가운데로 가져와 수트와 연결하는 넥타이는 중심을 잡아주는 비올라죠. 마지막으로 전체를 지탱하는 구두가 첼로입니다. 마치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 14번처럼, 쉼 없이 매일 이어지며 '나'를 연주하는 쿼텟입니다.
사중주의 연주자들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끌어안습니다. 각자 전체의 부분으로서 존재할 때 가장 큰 힘이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만약 사중주에서 어느 한 명이 나서 주인공이 되려 하면 전체 악곡을 망치게 됩니다. 때문에 이런 호흡은 끝없이 정제됩니다. 마침내 필요 없는 자극과 디테일이 생략된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어, 매우 강력한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수트의 힘 또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마치 달변가가 사용하는 뜻밖의 침묵처럼, 절제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버리게 됩니다. 남성의 옷차림 중에서 이런 형식을 가진 것은 수트 뿐입니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 절제될 때, 오히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강력한 인상을 만들어 내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수트를 디자인으로 보기보다는 한 호흡의 감정이라거나 일종의 리듬 같은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진화에는 형태의 종점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형태는 시대와 문화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다듬어지다가, 더 이상 덧붙이거나 덜어낼 것이 없는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진화를 멈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형식의 완성입니다. 고전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더 발전할 필요가 없는 종점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현대 수트의 기원은 18세기 조지 브럼멜George 'Beau' Brummell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만, 그 형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15세기부터 꾸준히 발전해 왔고, 브럼멜 이후로도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하여 마침내 형태의 종점에 다다른 고전입니다. 이제 수트는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극도로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어, 마치 사중주처럼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유행이나 부풀린 욕망으로 색과 형태를 장식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중주가 연주하는 한 곡의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보다 깊이 음미하기 바랍니다. 수트의 미감은 이미 순수한 지각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클래식입니다. 본질을 이해하고 소재의 본성을 존중하며, 자신의 분위기에 맞게 단정하게 입기를 권합니다.
글 김대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