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구: 배역도 그렇고, 영화를 고를 때도 그래요. 저는 뭔가를 처음 대할 때, 제 태도를 먼저 정해두고 시작해요. 스스로 '거기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다' 싶은 판단이 섰을 때에만 발을 들여요. 연기는 어쩔 수 없이 무수한 눈속임과 거짓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이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아까는 정말 낯설었어요. 이런저런 배역을 하면서 수트를 입은 모습에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옷은 전혀 판단이 서질 않더라고요. 처음 입어보는 옷이에요. 그동안 '저런 거 참 멋지다' 싶었던 그 사진에 내가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런 낯선 느낌이 적응이 안 돼서, 한동안 어쩔 줄 몰랐던 거예요.
이 옷은 장르가 달라요.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압도당한 건 사실이에요. 근데 막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욕망을 자극해요. 나도 이 모습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이걸 편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훨씬 좋은 모습이 될 것 같다, 그런 욕심이 강하게 생겨요. 이 옷에 익숙해지고 싶어요, 더 익숙해 보이고 싶어요.
대철: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석구 씨는 이미 클래식 수트의 차분함에 잘 맞는 담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그런 마음가짐이 있다면, 아마 앞으로는 훨씬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될 거예요. 남성복이라는 게 정신성이 참 강해요. '내 생각과 나의 몸, 그리고 옷', 이 세 가지가 서로 잘 붙어야 정갈한 맛이 나오거든요.
특히 석구 씨의 원래 체형, 힘이 완전히 빠진 몸, 얼굴의 인상이 정갈한 클래식 수트와 잘 맞아요. 수트는 꾸미는 옷이 아니라 남성의 조형미를 드러내는 옷이기 때문에, 클래식 수트를 입을 때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인상과 태도를 발견하고 가다듬는 것이 중요해요. 그냥 편하게 있으면 옷이 딱 붙어서 존재감을 드러내 줄 거예요.
석구: 거울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더라고요. 원래 나의 사고방식, 나의 원래 행동 방식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근데 정말, 옷에 먹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래도 서양인들의 복식이니, 어쩔 수 없이 낯설 수밖에 없겠다, 그러면 이걸 나만의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나만의 태도'를 길러야겠구나 싶어요.
욕심일지도 모르겠는데, 이걸 나의 또 다른 주제로 가져갈 수 있겠다 싶어요. 솔직히, 배우가 꼭 다양한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보다는 그가 가진 장점을 자연스럽게 내보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이 나의 주제가 된다면, 좀 더 무게감 있는 연기도 차차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대철: 맞아요, 이번 작업이 그런 거였어요. 석구 씨의 담백한 원래 이미지에 맞게 깨끗하고 얇은 평직 원단을, 그리고 화선지처럼 부드러운 얼굴 톤에 맞게 가장 밝고 깨끗한 회색으로 골랐죠. 하지만 좋은 디자인은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감의 깨끗함을 더욱 정갈하게 끌어올려서, 사람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 같은 은근한 디자인을 하려고 했어요. 깨끗하고 우아하게, 정갈하고 담백하게.
대철: 이번 옷이 아주 잘 나왔어요. 레리치의 특징이 잘 구현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요. 이건 테일러들끼리나 할법한 이야기지만, 정말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만든 옷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정교한 바느질이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을 거예요. 일본이나 이탈리아에서 가장 섬세하게 옷을 만든다는 테일러들과 비교해도 자신 있어요.
이 수트는 거의 모든 연결이 손바느질이에요. 가장 사소한 바지 밑단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손바느질로만 연결했어요.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바느질을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누구보다 정교하게 작업했지만, 굳이 공들여 감춰뒀죠. 그게 우리의 미감이에요. 손바느질의 흔적이 옷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또 하나 비밀을 말씀드리면, 석구 씨 옷은 4개의 홀컷으로 제작한 거예요. 보통 수트는 6개의 판으로 조각내서 몸통의 입체를 따라가요. 그렇게 하면 허리가 날렵하게 들어가는 옷이 나오죠. 하지만 이 옷은 한 장의 판에 세밀한 절개를 내서 일일히 곡면을 만들어 낸 거예요. 이렇게 하면 실루엣이 남성적으로 딱 떨어져요. 레리치는 어깨와 가슴, 그리고 라펠, 이 세 가지 주요 디테일에 풍성한 입체감을 주어서 몸 전체가 입체적으로 보이고, 거기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뉘앙스가 생기도록 하고 있어요. 이런 옷은 찾아보기 힘들죠.
석구: 정확히 표현은 못 하겠지만, 절제되어 있는 인상이 참 마음에 들어요. 다 드러내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데, 이 옷은 모든 부분이 절제되어 있고, 감춰져 있고, 또 통일감 있게 정리되어 있어서 좋아요. 왜, 뭔가 꾸며내면 반드시 티가 나잖아요. 그게 지나치면, 꼭 '내가 너보다 잘나 보일 거야' 같은 구체적인 의도가 언어화되는 느낌이거든요. 저는 옷을 갖춰 입더라도, 남과 비교하거나 치장하는 그런 가벼운 태도는 싫었어요. 나는 그냥 내 것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태도에서 진짜 매력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석구: 개인적으로는 작업의 과정 자체가 인상적이었어요. 대화도 즐거웠고, 결과물도 흥미로웠죠. 누군가 나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나를 해석해서,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그 기술로,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만든다는 거 말예요.
우리가 지금껏 미팅하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작 옷을 만드는 데 있어서 제가 관여한 건, 색깔을 고른 것뿐이었잖아요. 근데 저한텐 그게 당연했어요. 비스포크를 믿고 맡긴다는 건, 어쩌면 지금까지 테일러가 추구해 온 가치와 노력에 공감한다는 의미 같아요. 내가 멋있는 옷을 갖고 싶어서 여길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이런 비스포크와는 생각만큼 어울리는 거 같진 않아요.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요. 이번 작업이 의외로 큰 위로가 됐어요. 저는 정말로, 나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거든요. 근데 연기라는 게, 생각보다 배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는 않아요.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것이 약속대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결국 배우의 연기라는 건 정해진 형식 안에서, 아주 미묘한 디테일로 승부를 보게 돼요. 이런 건 순식간에 지나치는 아주 작은 부분들이어서, 비록 알아봐 주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 미세한 부분에 온 힘을 쏟아 완성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물론 이렇게 극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요. 더군다나 컨텐츠도 워낙 많고, 뭐든지 빨리, 가볍게, 쉽게 지나가버리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게 과연 올바른 시대정신인지, 내가 생각했던 만큼 가치가 있는 노력인지 의문일 때도 많죠. 이번에 레리치의 비스포크를 경험하면서, 저는 다른 의미로 든든했어요. 실제로 이렇게 집요하게 노력을 쏟아부어서 과정의 디테일을 완성해 가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역시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맞아. 감명 깊었어요.
대철: 비스포크는 굉장히 섬세한 문화에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문화라는 건, 서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모여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지, 누가 만든다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주 쉬워 보이는 결과물일지라도, 항상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과정이 있다는 걸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겠죠.
인터뷰 손석구, 김대철
사진 김준기, 안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