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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으로 남는 옷 An Impression Worn


시대는 오랫동안 ‘위대한 것’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장대한 사건, 압도적인 구도, 상징적인 인물, 무게감 있는 개념들.
예술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라 여겨졌습니다.

그에 비해, 일상의 풍경은 그 언저리에 머물렀습니다.
작고, 낮고, 사소한 감각들은 예술이라는 이름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어서, 혹은 익숙해서, 시선이 머물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예술의 재료들은 형태, 선, 색, 소리, 움직임 등 여러 형식으로 우리 생활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빈번한 접촉으로 인해, 그 시의들이 습관에 녹아들고 일상의 틈새로 사라지기 때문에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Hand Crafted - Nuova Scuola
Reglan Coat / Lum’s Golden Bale / Equilibrato, Metodico

바늘로 옷을 짓던 초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주변의 그런 작고 시적인 감각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르게 바라보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미감이었습니다.

1930년대의 이탈리아는 파시즘 체제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아르 데코, 초기 모더니즘, ‘이탈리아적 장인정신’이 병존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무솔리니는 남성성, 질서, 로마제국의 부흥을 강조했는데, 이에 따라 남성의 테일러링은 ‘국가의 이상적 남성상’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정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근엄하고 직선적인 수트가 단일한 전제주의의 ‘국가미학’으로 강요되었고, 강인한 남성, 통제된 질서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회 분위기는 점차 개인을 억누르고 산업화와 속도, 일률적 미학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장인, 특히 사르토(Sarto)들은 이러한 기계적 권위와 억압에 대해 소리 없이 저항했는데, 그 결과로 만들어진 기술이 Scuola Nuova (신학파)입니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중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미학적 흐름인 Nuova는 자연스러운 형태와 움직임,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구조, 완벽한 비례, 그리고 ‘몸과 직물의 관계성’을 예술적으로 구현했던 테일러링 기법입니다. 그들은 손의 감각으로 되살린 사물의 ‘호흡’을, 단순한 기술이 아닌 인간성과 존재를  회복하는 시적 언어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을 닮은 곡선과 인상, 느리게 흐르는 선과 같은 요소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테일러링의 핵심입니다.

 

The Atelier of Antonio Pascariello of Naples

Antonio Pascariello and Giulio of Atelier


Scuola Nuova의 태도는 지금도 몇몇 장인의 손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레리치의 Maestro Giulio 역시 그 흐름 안에 있습니다.

Giulio는 전통적인 Nuova의 기술을 사용해 예민하고, 느린 바느질을 구현해 왔습니다. 1951년 부터 75년간 Nuova의 명맥을 이어온 나폴리의 사르토, Antonio Pascariello에게 사사한 그는 바느질을 과시하지 않고 안으로 숨기는 Nuova의 섬세한 기술 방식에 매료되어 사르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 옷에 아름다운 선과 특징을 부여해서 가지고 싶게 만드는 미감은 오히려 여성적이라고 생각해요. 간결함 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의 장엄함이 제가 생각하는 남성적인 미감입니다. 겉으로 담담한듯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섬세하고 예민하게 느껴지는 인상은 바늘로 쉽게 구현하기 어려운 영역이죠. 그 미묘한 감각은 어쩌면, 인간이 ‘의복을 입는다’는 행위보다 더 오래된 본능, 즉 자신을 감싸는 세계를 이해하고 조율하는 태도에 닿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_Giulio ”

그의 말처럼, 바느질의 기술이 극에 이르고 표현에 힘이 빠지면, 일반적인 감각과는 다른 심화된 미감이 드러납니다. 익숙한 것이 낯설게 다가오고 형태는 선명하게 다듬어지기보다 감정적인 인상으로 머뭅니다. 손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자주 멈추며, 때때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 느린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감각 - 조금은 서툴고 섬세한 인간만의 인지 방식-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바느질은 단지 기술의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일은, 결국 그 사람의 태도와 리듬, 기질을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장인의 손은 매 순간 선택하고 조율하며 미세한 판단을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효율이나 완성보다, 오히려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속도에 쫓기지 않고 설명보다 감각에 기울이며 구조보다는 균형에 민감해지는 것. 레리치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다시 회복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Hand Crafted - Scuola Nuova, One-button, Single-breasted Jacket, Silk & Cotton

 

 

김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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