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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quis 레리치 X 손석구

1.

막 시작하는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몇 번을 봤던 영화가 TV에서 다시 시작할 때마다, 나는 늘 처음 보는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그건 마치, 스크린에서 농밀한 냄새 분자들이 잔뜩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다. 모험을 부추기는 페로몬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글로 옮기면 이런 느낌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책은 이렇게 두근거리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다. 작가의 체취를 진하게 남긴 초대장, 이런 문장을 읽으면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다.

 

2. 

도입부의 두근거림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생각이지만, 잊기 전에 이 자유분방한 배우의 첫인상에 대해 말해둬야겠다. 시월의 첫날, 배우 손석구 씨가 레리치의 아뜰리에를 방문했다. 헐렁한 후드를 걸치고, 완전히 힘이 빠져 굽은 등을 하고 온 그는, 이 낯선 테이블을 보자마자 축 늘어져 앉는 방법으로 자신의 분위기를 설명해 냈다.

필모그래피가 그리 긴 배우는 아니지만, 나는 그를 '차실장'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짜고짜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는 『60일, 지정생존자 (2019)』에서 '차실장'은 이야기의 굵은 줄기에서 비켜난 인물인데, 석구 씨는 어쩐지 주목하게 만드는 연기로 시종일관 나의 시선을 훔쳐냈다. 또박또박 각이 진 정극 연기자들 사이에서 그의 자유분방한 필체는 상당히 도드라진다.

"레리치 인스타그램 봤어요. 저도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어..." 실망스럽게도, 배우 손석구는 숨 쉴 틈도 없는 대사를 몰아치던 차실장이 아니다.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한 번씩 오른쪽 허공을 올려다보며 다음 단어를 찾느라 애를 먹는다. "숨겨놓은 디테일을 발견할 때 희열을 느껴요. 숨길수록 강하게 드러나는 게 있어요." 그는 '희열'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역설을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저런 건 글 쓰는 사람의 버릇이다. 부드러운 몸 때문에 언뜻 헐렁해 보이긴 해도, 그의 언어는 가볍지 않다.

 

3.

그는 '희열'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역설을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저런 건 글 쓰는 사람의 버릇이다. 부드러운 몸 때문에 언뜻 헐렁해 보이긴 해도, 그의 언어는 가볍지 않다. "뭔가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 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이 대화에 두 사람은 완전히 몰입해 있다. 이리저리 옷을 뒤적여가며 꼭꼭 숨겨놓은 디테일을 함께 발견하는 동안, 그의 안면 근육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감탄을 표현하고,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한다. 석구 씨 또한 레리치가 발산하는 특유의 페로몬을 감지한 모양이다.

"의도가 보이는 것은 이성적인 선에서 이해를 하고 말지만, 뭔지 모르게 느껴지는 것에는 공감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보다 어려운 표현법은 없을 것 같아요. 연기도 그렇거든요. 일부러 보여주거나 멋부리면 아무도 감동하지 않아요. 안에서부터 꽉 차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공감하고 빠져드는 거죠. 저도 그런 게 하고 싶거든요, 진짜."

석구 씨는 이 자리에 앉았던 다른 어느 누구보다 진지해 보인다. 그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싶다. "저마다 자기 예술을 추구하는 방식이 있는 거니까요."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들과 일하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지금 당장은 잘 안 맞아도, 결국 결과물에 온전한 생각이 담기니까" 꼭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세상엔 굳이 필요한 고통들이 있는 법이다.

 

4.

석구 씨는 얼마 전, 제작 중인 영화 『바이러스 (예정)』 에 특별출연하면서 잠시 배우 김윤석 씨의 현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 "1초만 봐도 알겠더라고요." 오랫동안 전력을 다해 뭔가를 쌓아온 사람에게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다. 딱히 애쓰지도 않는데, 얼핏 보기만 해도 티가 난다. 너무 자연스럽고 밀도가 높아서 선뜻 세세하게 분석할 수는 없어도, 그런 걸 보면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말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진다.

매력을 알아차리는 데는 1초면 되는데, 그렇게 밀도 높은 분위기를 잘 갈무리하는 데는 삶의 일부씩이나 필요하다. 세상에 쉽게 하는 연기 같은 건 없다. 자기 몸을 완전히 쓸 줄 알아야 하고, 자기감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하나의 삶에 한 땀 한 땀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경험이 배우 내면에 오랜 시간, 더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야, 비로소 자연스러움이 흘러나온다.

석구 씨는 이곳에서 그런 걸 본 것 같다. 석구 씨가 보름 만에 다시 온 것은 Imbastitura(basting fitting)를 위해서다. 선택한 원단을 정해진 패턴으로 떠서, 시침질로 가볍게 만든 옷의 껍질(가봉)이다. 이걸 몸에 대고 좀 더 세밀하게 조정한 뒤, 손바느질로 속을 채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레리치의 옷 만들기가 시작되는 거다. 이를테면 밑그림인 셈이다. 그런데 이 옷이 참 재미있다. 어차피 없어질 바느질인데, 참 정성스럽게도 만들었다.

5.

어떤 작가들은 좋은 도입부를 만들기 위해 꽤 오랫동안 고민한단다. 도입부 한 문장에 일필휘지로 장편이 쓰이기도 하고, 그 한 문장을 손에 못 쥐어서 글을 못 쓰게 되기도. 그래서 영리한 작가들은 도입부를 가장 나중에 쓴다. 그러다 이미 써둔 글 전체가 바뀌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생각해보면 배우라는 직업이야말로, 첫인상과 그 이미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전혀 다른 인생을 연기하면서, 짧은 시간에 보는 사람을 납득시키고, 공감을 얻고, 감정을 불러일으켜, 깊은 감동까지 남겨야 하니까. 전혀 쉬운 직업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짧은 인상, 찰나의 이미지가 다름 아닌 깊은 내면과 오랜 노력에서 배어 나온다니. 어쩌면 이들은 자기 시간을 아낌없이 달여, 한 줌의 에센스를 짜내고 있는 것이려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나는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곤 했다. '그건 사람들이 가벼워서 그럴 뿐'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오해다. 첫인상은 쉽게 꾸며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제대로 속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면, 정말로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수 있다. 정직하기란 정말 어렵지만, 차라리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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